『씨앗과 그림자』 1장 -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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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과 그림자』

프롤로그. 그날 밤, 궁궐

1895년 10월 8일 밤, 경복궁의 처마 끝에는 축축한 안개가 매달려 있었다. 궁궐은 겉보기에 고요했다. 돌바닥 위로 스며드는 밤공기는 차고, 마당의 나무들은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는 오래가지 못할 고요였다. 마치 눈을 감고 있는 짐승의 가슴 아래에서 이미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는 것처럼, 궁 안팎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어둠 속, 검은 옷깃을 세운 자들이 서로의 얼굴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낮게 몸을 숨기고 움직였다.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한 번, 짧고 차갑게 스쳤다. 칼집에서 칼이 아주 조금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소리였다.

“시간이다.”

누군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떨리지 않음이 오히려 더 섬뜩했다. 오래 준비해 온 사람의 목소리였다. 망설임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비어 있는 단단함.

그들 가운데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얼굴의 윤곽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눈만은 희미한 불빛을 받아 짧게 흔들렸다. 우범선이었다.

그는 이를 꽉 물고 있었다. 가슴속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쌓여온 어떤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돌아가라고. 지금이라도 물러서라고. 그러나 또 다른 소리도 있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네가 끝난다고. 이 밤은 이미 시작되었고, 시작된 밤은 피 없이 끝나지 않는다고.

“대감.”

뒤에 있던 자가 속삭였다.

우범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하셔야 합니다.”

우범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와 처마 밑 등을 흔들었다. 흔들리는 불빛이 그의 턱선을 잠깐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고 있었다. 조선의 궁궐 한복판. 그리고 역사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밤의 문턱.

“들어간다.”

명령이 떨어지자 그림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순간, 정적은 산산이 깨졌다.

문짝이 거칠게 밀리며 부딪혔고,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졌다. 궁녀들의 짧은 비명이 공기를 가르며 터졌다. 누군가 넘어졌고, 누군가의 옷자락이 잡아찢겼다. 사람들은 제각기 도망치거나 숨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얼굴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찾아라! 왕비를 찾아!”

칼끝이 가리키는 방향마다 공포가 쏟아졌다. 방 안의 기물들이 넘어지고, 병풍이 찢어지고, 등불이 바닥에 구르며 기름 냄새가 퍼졌다. 우범선은 그 소란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발은 바닥에 닿아 있는데, 마음은 이미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 안쪽에서 여인 하나가 끌려 나왔다.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옷자락은 헝클어졌지만, 그 눈빛만은 무너지지 않았다. 공포로 떨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눈동자에는 이상할 정도로 선명한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분노, 경멸,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겠다는 차가운 위엄.

“이 사람이오.”

누군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우범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명성황후.

그 이름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구를 찾고 있었는지, 누구를 향해 이 밤의 칼이 모여들었는지.

황후의 시선이 우범선에게 멈췄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한 인간의 일생보다 길게 느껴졌다.

우범선은 자신이 꿰뚫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눈빛은 살려 달라는 눈빛이 아니었다. 왜냐고 묻는 눈빛도 아니었다.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너희가 누구인지, 무엇을 선택했는지,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눈빛.

그는 무의식중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멈춰야 한다.’

그 생각이 처음으로 분명한 언어를 갖추었다.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 이 밤은 잘못되었다. 아니,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더라도, 그래도 여기서 멈춰야 한다.

그러나 바로 등 뒤에서 누군가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멈추면 네가 죽는다.”

그 한마디가 칼보다 깊게 들어왔다.

우범선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그는 오래전부터 이 밤을 선택해 왔는지도 몰랐다. 권력에 기대고, 살아남기 위해 눈을 감고, 자기 자신에게 작은 변명을 하나씩 허락해 온 지난날이 결국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지도 몰랐다.

황후의 눈빛은 여전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우범선은 견딜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 직후, 무언가가 급히 움직였다.

비명은 날카로웠고, 곧 끊겼다.

칼이 내리쳐지는 소리, 옷감 찢기는 소리, 넘어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누군가는 숨을 몰아쉬었고, 누군가는 다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한번 터진 폭력은 순식간에 제 몸집을 불려 사람들을 휩쓸었다.

우범선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차갑고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눈앞에서 무너져 내린 것은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마지막 체면이었고, 자신이 아직 인간일 수 있다고 믿어온 아주 작은 부분이기도 했다.

밤은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의 숨소리가 사라지자, 궁궐은 오히려 더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바람이 지나가며 등불을 흔들었다. 흐트러진 방 안에 남은 것은 피 냄새와 탄 기름 냄새, 그리고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밤의 흔적뿐이었다.

우범선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무엇인가 묻어 있었다. 피인지, 먼지인지, 그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문득 아주 먼 훗날을 보았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너무 어려 아무것도 모를 어떤 아이의 얼굴을.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듣게 될 순간을.

우범선.

그 이름은 이제 다시는 깨끗해질 수 없었다.

그날 밤, 조선의 왕비가 죽었다.

그리고 한 남자의 이름은, 영원히 어둠 속에 남겨졌다.


1장. 피로 남은 이름

1903년, 일본 도쿄의 하늘은 이상할 만큼 맑았다.

아이에게는 맑은 하늘이 좋은 일이었다. 날이 맑으면 어머니가 빨래를 널고, 골목 끝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햇빛은 대문 앞 돌바닥까지 들어와 따뜻한 냄새를 만들었다. 어린 우장춘은 그런 날이면 나무 조각이나 작은 돌멩이를 모아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곤 했다.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쓸모도 없는 것들이었지만, 아이에게는 그것들로 충분했다. 세상은 작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직 많지 않았다.

그날도 장춘은 마당 한쪽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는 매끈한 나무 조각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오래 문질러져 반질반질해진 그것은 본래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장춘은 그것을 작은 배라고 생각했다. 손가락 끝으로 밀면 배는 모래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장춘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는 문지방 안쪽에 서 있었다. 평소와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입술은 굳어 있었고, 눈빛은 자꾸만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아직 오지 않은 무엇을 이미 보고 있는 사람처럼.

“밖에 나가지 마.”

“왜요?”

“그냥… 오늘은 집에 있어.”

어머니는 일본말로 말했다. 장춘은 그 말이 익숙했다. 집 안에서는 일본말이 더 자주 들렸다. 그러나 어떤 단어들은 말보다 먼저 분위기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조심해야 하는 날이었다.

“아버지는요?”

어머니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들어오실 거예요.”

거짓말이었다. 아이도 그건 느낄 수 있었다. 어른들의 거짓말은 늘 단어가 아니라 숨 쉬는 법에서 드러났다. 대답이 너무 빨리 나오거나, 너무 늦게 나오는 식으로.

장춘은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손가락은 더 이상 나무 조각을 밀지 않았다.

잠시 후 골목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여러 사람의 발소리와 말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누군가 화가 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고,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말리듯 낮은 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대문 바깥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장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마.”

어머니가 급히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는 문틈으로 달려갔다. 마른 나무문 사이, 아주 가느다란 틈으로 바깥이 보였다.

낯선 남자들이 서 있었다. 어떤 이는 이를 악물고 있었고, 어떤 이는 입술을 비뚤게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장춘이 잘 모르는 종류의 얼굴이었다. 화가 나 있으면서도 그 화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것처럼 익숙한 얼굴.

“여기냐?”

“맞다더라.”

“저 안에 그놈 가족이 있대.”

장춘은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 어머니와 자신. 그리고 아버지.

“그 자식 아들이야.”

한 남자가 말했다.

장춘은 눈을 깜빡였다. 자식. 아들. 그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명성황후를 죽인 놈.”

이번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아이는 그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이 칼처럼 날카롭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단어를 내뱉을 때, 그 말이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얼굴로 먼저 드러내곤 했다. 지금 문 밖에 선 사람들의 얼굴이 바로 그랬다.

뒤에서 어머니가 장춘을 끌어안듯 품으로 당겼다.

“보지 마.”

“어머니…”

“듣지 마.”

어머니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문밖에서 누군가 문을 세게 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무서운 방식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서서 욕설을 내뱉고, 낮게 저주를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발걸음을 돌렸다. 마치 이 집이 어떤 낙인으로 충분히 표시되었다는 듯이.

소란이 멀어진 뒤에도 집 안의 공기는 한참 동안 풀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장춘을 꼭 안고 있었다. 너무 세게 안아서 어깨가 아플 정도였다. 그러나 장춘은 밀어내지 않았다. 어머니의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저녁, 해가 지고 방 안에 등이 켜졌을 때에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장춘은 문 쪽을 여러 번 돌아보았다.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먼저 뛰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나 바람 소리뿐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어머니의 얼굴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등잔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눈 밑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평소라면 밥을 먹으라며 타이르거나, 늦었다며 눕히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의 어머니는 마치 다른 세상에 절반쯤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 같았다.

“어머니.”

장춘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머니는 한참 만에 시선을 내렸다.

“응.”

“아버지는 언제 와요?”

대답이 없었다.

장춘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질문을 했다.

“아버지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그 순간 어머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장춘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 속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놀람, 슬픔, 두려움, 그리고 아직 아이에게 건네서는 안 되는 어떤 진실.

밤이 아주 깊었을 때, 마침내 사람이 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좋지 않은 소식임을 알렸다. 좋은 소식은 망설이지 않는다. 기쁜 사람은 문 앞에서 숨을 고르지 않는다.

어머니가 문을 열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얼굴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고, 눈은 장춘 쪽을 보지 못했다.

“사모님.”

그 한마디에 어머니의 무릎이 먼저 꺾였다.

사내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큰일이… 났습니다.”

장춘은 어른들의 말이 갑자기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어들이 귀에 닿기는 했지만 뜻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습격, 원수, 끝났다, 피하지 못했다.

그는 방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머니는 주저앉은 채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소리를 내 울고 싶어도 아이 때문에 끝내 소리 내지 못하는 사람의 울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장춘은 천천히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요?”

사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돌아가셨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너무 짧았다.

사람 하나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저렇게 짧은 말로 끝날 수 있을까.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 큰 일인데, 어른들은 그것을 왜 이렇게 작은 소리로 말하는 걸까.

장춘은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남편의 죽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두려움.

사내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조선인들이…”

그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충분했다. 어머니는 이미 알아들은 듯 고개를 숙였다.

장춘은 그 말을 마음속에 넣어 두었다. 조선인.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 그렇다면 아버지는 조선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사람이었던 걸까. 왜?

그날 밤, 장춘은 잠들지 못했다.

어머니는 등을 켜 둔 채 앉아 있었다. 등불은 작고 노랬다. 방 안의 그림자는 벽에 붙어 가만히 흔들렸다. 장춘은 이불 속에서 눈만 내놓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울다 지쳐 더 이상 울지도 못하는 얼굴이었다.

“어머니.”

이번에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왜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그랬어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에요?”

그 질문은 방 안의 공기를 완전히 멈추게 했다.

어머니는 숨을 들이켰다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눈동자에는 고통이 차올랐고, 입술은 몇 번이나 열렸다 닫혔다.

“장춘아.”

그녀는 마침내 아이의 이름만 불렀다.

“사람은…”

그 다음 말을 고르지 못한 채,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장춘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이는 아직 세상이 그렇게 복잡하다는 것을 몰랐다.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왜 곧바로 말할 수 없는지, 왜 어른들은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침묵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날 이후로, 아버지는 단순히 집에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아버지는 하나의 질문이 되었고,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는 것.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장춘은 이불 끝을 꼭 쥐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아직도 어머니의 흐느낌이 아주 작게 남아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굵은 목소리, 큰 손, 가끔 스쳐 지나가던 옷 냄새 같은 것들만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때 아이는 아직 몰랐다.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오래 자신을 따라다닐 것은, 아버지의 부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을.


 

2장.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

장례가 조용히 치러진 뒤에도 집 안의 공기는 좀처럼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옅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집에서는 슬픔보다 먼저 소문이 자리를 잡는다. 우범선이 죽고 나자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입이었다.

시장에 가면 누군가가 힐끗 쳐다보았다. 우물가에 서면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대화가 어색하게 끊겼다.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말을 빨리 배운다. 뜻은 몰라도 말의 힘은 먼저 익힌다.

장춘이 골목에서 혼자 돌을 차고 놀고 있을 때였다.

아이 셋이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평소에도 얼굴은 익숙했지만, 함께 놀아 본 적은 없었다. 그중 키가 가장 큰 아이가 장춘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야.”

장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 그 사람 아들이라며?”

“누구?”

“그 배신자.”

장춘은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멈췄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의 망설임을 무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조선 왕비 죽인 놈 말이야.”

다른 아이가 킥킥 웃었다.

“그러니까 얘도 나쁜 놈이네.”

장춘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자신이 모르는 죄를 자기 몸에 억지로 덮어씌우고 있는 듯했다.

“아니야.”

그가 작게 말했다.

“뭐가 아니야?”

“우리 아버지…”

말은 거기서 멈췄다. 장춘은 끝을 몰랐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지, 무엇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의 침묵을 비웃음으로 받아들였다.

“봐, 말도 못 하잖아.”

키 큰 아이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별로 세지 않은 힘이었지만 장춘은 몇 걸음 비틀거렸다.

“너도 조선인이야? 일본인이야?”

그 질문에 아이들끼리 먼저 웃음이 터졌다.

“둘 다 아니지.”

“어중간한 놈.”

그날 장춘은 처음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정확히 말하면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분노는 힘보다 먼저 눈물을 데려왔다. 그의 주먹은 엉성하게 허공을 스쳤고, 곧장 다른 아이의 팔에 막혔다. 다음 순간 누군가 밀었고, 그는 바닥에 넘어졌다. 흙먼지가 일었고 손바닥이 까졌다.

아이들은 잠깐 그를 내려다보더니, 재미가 끝났다는 듯 돌아섰다.

“더러운 놈.”

그 말만 남기고.

장춘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손바닥에서는 피가 조금 배어 나왔다. 까진 상처보다 더 아픈 것은 가슴속 어디선가 쿡쿡 찔리는 느낌이었다. 왜 맞아야 했는지 정확히 모르는데도, 이유가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상황. 아이가 견디기에는 너무 애매하고 너무 무거운 모욕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뭐니?”

“넘어졌어요.”

“누가 밀었어?”

장춘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씻기며 물었다.

“무슨 말을 들었니?”

장춘은 그제야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이 동네에서 들리는 말들이 아이에게도 언젠가는 닿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얼굴.

“배신자래요.”

어머니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어머니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춘은 계속 말했다. 어차피 이미 시작된 질문이었다.

“어머니, 배신자는 뭐예요?”

어머니는 젖은 수건을 꼭 쥐었다.

“원래 자기 편이어야 할 사람을… 등지는 사람을 그렇게 말해.”

“아버지는 누구 편이었는데요?”

그 질문에 어머니는 끝내 아이를 보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장춘은 알아차렸다. 세상에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그날 밤, 그는 혼자 방 한구석에 앉아 아버지의 이름을 종이에 써 보았다. 서툰 글씨였다.

우범선.

이름은 단지 이름일 뿐인데, 왜 사람들은 그것을 뱉을 때 얼굴을 찌푸릴까. 왜 어떤 이름은 그 사람 하나로 끝나지 않고 그의 가족까지 더럽히는 걸까.

장춘은 종이를 구겼다 펴기를 반복했다. 마치 그 이름을 없앨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종이가 구겨질 뿐,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 뒤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나갈 때, 뒤쪽 자리의 학생 하나가 일부러 크게 말했다.

“조선에서 왕비를 죽인 사람은 일본에서 잘 사는 줄 알았더니, 결국 똑같네.”

장춘은 책을 챙기던 손을 멈췄다.

“무슨 뜻이야?”

“너네 집 말이야.”

아이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악의보다는 따라 배운 잔인함이 묻어 있었다. 그게 더 잔인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일이 이미 놀이가 되어 버린 얼굴.

“선생님도 네 이름 기억하시더라.”

주변에서 작은 웃음이 났다.

“유명해서 좋겠다.”

장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걸어가서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바뀔까 싶기도 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교실을 나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밑에서 자갈이 자꾸 튀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울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장춘은 사람들의 얼굴보다 목소리를 먼저 경계하게 되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본능적으로 그 안에 비웃음이 섞여 있는지부터 살폈다. 이름은 누군가 불러 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에게 이름은 남의 입을 통해 더럽혀지는 방식으로 먼저 존재했다.

우장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뒤에 곧바로 따라붙는 또 하나의 이름.

우범선의 아들.

그 사실은 장춘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괜히 먼저 나서지 않았고, 친구를 사귀는 일에도 서툴러졌다. 웃고 떠드는 무리 근처에 가면 왠지 모르게 어깨가 굳었다. 누군가의 농담 한마디가 언제 돌처럼 날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묵이 상처를 막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상처가 생기는 소리를 조금 늦출 뿐이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장춘은 학교에서 돌아오다 비를 피하려 처마 밑에 잠시 섰다. 그 옆에는 나이 많은 노인이 먼저 서 있었다. 노인은 젖은 수염을 훔치며 장춘을 힐끗 보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비 죄가 자식 죄는 아니지.”

장춘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생각 안 해.”

그리고 그뿐이었다. 노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장춘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위로를 받은 것 같기도 했고, 더 깊은 절망을 배운 것 같기도 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사람들은 피를 기억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이미 어떤 이야기 속 인물로 규정되어 버렸다는 사실.

그날 밤, 장춘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창밖에는 빗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다가 어느새 졸고 있었다. 바늘 끝에 걸린 실이 희미한 등불 아래서 가늘게 빛났다.

장춘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 말은 분명했지만, 동시에 너무 약했다. 세상은 그런 문장을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느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기도 전에 누군가의 과거를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상속은 재산이 아니라 그림자라는 것을.


 

3장. 질문

겨울이 찾아오자 집 안은 더 조용해졌다.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얇은 숨처럼 차가웠다. 어머니는 밤이면 화로 가까이에 앉아 손을 녹이며 바느질을 했다. 장춘은 그 옆에서 책을 펴 놓고도 한참 동안 글자를 읽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라고, 상점은 문을 열고, 계절은 바뀌었다. 그런데 장춘의 마음속 시간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밤 어딘가에 아직 걸려 있었다. 아이에게 죽음은 설명되지 않은 문과 같았다. 더구나 그 죽음이 미움과 연결되어 있다면, 문은 더 낯설고 더 무거웠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된장국 냄비를 불에서 내리다가 손을 데었다. 짧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에 장춘이 일어나 물을 가져왔다. 어머니는 괜찮다고 했지만, 장춘은 젖은 수건을 건네며 가만히 그녀의 손을 보았다. 손등에는 예전보다 잔주름이 많아져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는 갑자기 늙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다가 장춘은 문득 생각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누구도 먼저 말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묻는 수밖에 없다고.

“어머니.”

어머니가 젖은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왜 그러니?”

장춘은 잠시 숨을 골랐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이 질문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니?”

“사람들이 자꾸 말하니까요.”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도망치듯 시선을 피하면 다시는 묻지 못할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는데, 정말이에요?”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불 위의 냄비에서는 아직 김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방 안에는 된장 냄새와 겨울 저녁의 차가운 공기가 함께 섞여 있었다.

“장춘아.”

어머니가 천천히 말했다.

“사람은… 한 가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단다.”

장춘은 그 말이 싫었다. 어른들은 꼭 그런 식으로 말했다. 마치 정답이 있는데도 바로 주지 않고, 미로 속으로 먼저 밀어 넣는 사람들처럼.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요?”

“그래.”

“왜요?”

어머니는 화로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붉은 불씨가 조용히 꺼져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가도, 잘못된 길로 가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을 했어도 자기 안에 인간다운 마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닐 수도 있어.”

장춘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럼 아버지는 잘못된 길로 간 거예요?”

어머니의 눈가가 천천히 젖었다.

“네 아버지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목 안에서 걸린 돌을 삼키듯 힘겹게 숨을 삼켰다.

“겁이 많았을지도 몰라.”

장춘은 이해하지 못했다.

“겁이 많아서요?”

“사람은 두려우면 자기가 옳다고 믿고 싶은 쪽으로 가기도 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그 말은 아버지를 변호하는 것 같기도 했고, 누구보다 냉정하게 단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장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아버지는 나쁜 일을 한 거네요.”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그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거야.”

“어머니는요?”

그 질문에 그녀는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오랫동안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동시에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을 끝내 부정할 수도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네 아버지를 사랑했어. 하지만… 그가 한 일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

장춘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복잡한 고백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의 선택을 용서하는 것은 같지 않다는 사실.

“아버지는 왜 그랬어요?”

어머니는 창밖을 보았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권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역사를 움직인다고 생각해.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역사의 두려움에 끌려가기도 하지.”

“역사의 두려움?”

“무너지면 함께 무너질까 봐, 버림받을까 봐, 뒤처질까 봐.”

장춘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럼 아버지는 약한 사람이었어요?”

어머니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강한 척했지만, 어쩌면 그 누구보다 약했을지도 몰라.”

그날 밤, 장춘은 처음으로 아버지를 영웅도 악마도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상상해 보았다. 무섭고, 흔들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 그 상상은 오히려 더 괴로웠다. 괴물이라면 미워하기 쉬웠을 텐데, 인간이라면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해는 때때로 용서보다 더 잔인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해요?”

그가 물었다.

어머니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이니?”

“사람들이 아버지 얘기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요?”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춘 곁에 앉았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가 아버지 대신 죄를 질 필요는 없어.”

“하지만 사람들이 자꾸 나를…”

“알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단했다.

“세상은 네가 원하지 않아도 아버지의 이름을 네 어깨에 올려놓을 거야. 하지만 그걸 어떻게 짊어질지는, 결국 네가 정해야 해.”

장춘은 그 말을 오래 기억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직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는 이 문장이 자신의 삶 한가운데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날 밤 늦게, 어머니는 잠든 줄 알았던 장춘의 이불을 다시 덮어 주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너는… 네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장춘은 눈을 감은 채 그 말을 들었다.

그 말은 축복 같기도 했고, 부탁 같기도 했고, 어쩌면 저주를 피하기 위한 마지막 주문 같기도 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동안,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또렷이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기억은 자꾸 흐려졌다. 얼굴 대신 남는 것은 질문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정말 그 길밖에 없었을까.

사람은 얼마나 두려우면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그리고 가장 무서운 질문 하나.

자신 안에도 그런 피가 흐르고 있는 걸까.

장춘은 이불 속에서 손을 꼭 쥐었다. 작고 마른 손이었다.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손. 그러나 언젠가 무엇을 선택하게 될지 모르는 손.

그는 마음속으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알고 싶다.’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그 질문은 훗날 그의 삶을 먼 곳까지 끌고 갈 씨앗이 되었다.


 

4장. 도망칠 수 없는 것

봄이 되자 거리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장춘의 마음은 겨울을 완전히 지나오지 못한 듯했다.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고, 집 앞 화분을 바꾸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누군가의 과거는 계절과 상관없이 계속 같은 무게로 남아 있었다.

장춘은 이제 사람들의 눈빛을 읽는 법을 배워 가고 있었다.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도, 어딘가에서 우범선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면 눈빛이 아주 잠깐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기심, 불편함, 또는 은근한 경멸. 그것들은 아주 짧게 스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점점 더 혼자 있는 시간을 택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강가를 따라 한참을 걷거나 빈 공터에 주저앉아 먼 데를 바라보곤 했다. 혼자 있으면 적어도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침묵은 외롭지만 덜 모욕적이었다.

어느 날, 장춘은 강둑 근처에서 흙을 파헤치고 있는 노인을 보았다. 작은 텃밭이었다. 노인은 좁은 땅에 줄을 맞춰 씨앗을 묻고 있었다. 손놀림이 아주 느리고 정확했다. 장춘은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인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게 보면 씨앗이 겁먹는다.”

장춘은 당황해 한 걸음 물러섰다.

노인이 웃었다.

“농담이다. 와서 볼래?”

장춘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노인의 손에는 작고 단단한 씨앗들이 놓여 있었다. 너무 작아서, 이런 것에서 정말 싹이 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게 뭔데요?”

“무 씨앗이다.”

노인이 흙을 손바닥 위에 펴 보였다.

“땅은 거짓말을 잘 안 한다. 잘 심으면 올라오고, 못 심으면 안 올라오지.”

장춘은 그 말을 이상하리만큼 오래 곱씹었다. 사람과 달리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과 달리 땅은 누구의 아들이냐고 묻지 않는다. 잘 심으면 올라오고, 못 심으면 안 올라온다. 이유가 분명한 세계.

그는 무심코 물었다.

“씨앗은 자기가 뭔지 알아요?”

노인이 눈을 깜빡였다.

“뭐?”

“그냥… 무 씨앗이면 자기가 무라는 걸 아냐고요.”

노인은 한참 장춘을 보다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알 리 없지. 다만 자라 보면 알게 되겠지.”

장춘은 그 말에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자라 보면 알게 된다.

그렇다면 자신도 언젠가 자라 보면 알게 될까.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아버지와 같은 피가 얼마나 자신 안에 남아 있는지, 혹은 정말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날 이후 장춘은 가끔 그 텃밭 근처를 찾았다. 노인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장춘도 묻지 않는 날이 많았다. 대신 그는 흙을 보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마른 흙과 좋은 흙의 차이, 싹이 막 올라오려는 자리의 미세한 틈, 잎 하나가 햇빛을 받는 각도 같은 것들.

이상하게도 그 세계는 그를 편안하게 했다.

사람들의 말은 모호했다. 그러나 식물은 분명했다. 시들면 시드는 이유가 있고, 살아나면 살아나는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 배신이나 혈통 같은 단어는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학교에서 일본사 수업을 하던 날이었다. 교사가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언급했고, 교실 뒤편에서 누군가 장춘 쪽을 흘끗 보며 피식 웃었다. 장춘은 즉시 알아차렸다. 이제 그는 웃음의 방향만으로도 자신이 겨냥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 교사 한 명이 그를 불렀다.

“우.”

장춘은 걸음을 멈췄다.

교사는 잠시 말할 듯 말 듯하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괜한 말에 흔들리지 마라. 공부를 열심히 해라.”

좋은 뜻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장춘에게는 그것조차 아프게 들렸다. 괜한 말. 남에게는 괜한 말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날마다 살을 베어 내는 말인데.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 마치 잘해 내면 모든 낙인이 사라질 수 있다는 듯한 말.

장춘은 고개만 숙인 채 교실을 나왔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는 자기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어머니 쪽을 닮은 눈매, 그러나 어딘가 아버지의 흔적일지도 모르는 턱선. 그는 처음으로 자기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거울 속 아이는 분명 자신인데, 동시에 누군가의 증거처럼 보였다.

‘도망칠 수 없다.’

그는 생각했다.

이 얼굴에서도, 이 이름에서도, 이 피에서도.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도망치는 대신, 자기 힘으로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그러나 그때의 장춘은 아직 몰랐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어떤 길로 가야 아버지의 그림자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지.

다만 아주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쩌면 답은 흙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5장. 일본이라는 섬

시간은 흘렀고, 장춘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몸이 자라고 목소리가 변해 가는 동안에도, 그의 안에 남은 질문들은 함께 자랐다.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 어릴 때는 단순히 아버지가 나쁜 사람인지 궁금했다면, 이제는 더 복잡한 물음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느 쪽 사람인가.

어느 쪽에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은, 대체 어디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가.

일본 사회에서 그는 완전히 일본인이 아니었다. 조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은근히 그를 다른 자리로 밀어 놓았다. 그렇다고 조선인의 공동체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고, 그의 말투와 생활 역시 일본 땅에서 자란 사람의 것이었다. 조선의 피와 일본의 공기가 한 몸 안에 들어 있었지만, 그 혼합은 조화라기보다 균열에 가까웠다.

그는 자주 스스로를 섬 같다고 느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으나 어느 대륙에도 닿지 못하는 작은 섬. 멀리서 보면 분명 어딘가에 속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홀로 떠 있는 땅.

학교 도서관은 그런 그에게 드문 피난처였다. 책들은 사람처럼 눈빛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책장 사이의 침묵은 유난히 정직했다. 질문이 있으면 읽고, 모르겠으면 더 읽으면 되었다. 적어도 거기에는 혈통 대신 지식이 기준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완전한 피난은 아니었다. 어떤 위인전에서는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의 이름이 찬란하게 적혀 있었고, 어떤 역사책에는 반대로 나라를 해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장춘은 가끔 그런 페이지를 넘기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어느 쪽일까. 아마 후자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읽을 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는 책을 덮고 창밖을 보곤 했다.

봄이면 벚꽃이 피고, 여름이면 매미가 울고, 가을이면 마른 잎이 운동장을 쓸고 지나갔다. 일본은 아름다운 계절을 가진 나라였다. 그러나 장춘에게 그 아름다움은 늘 어딘가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 풍경 속에 살고 있었지만, 완전히 그 풍경의 일부가 된 적은 없었다.

그 즈음, 생물과 식물에 대한 관심은 더 깊어졌다. 처음에는 단지 흙이 좋았다. 조용하고, 분명하고, 사람처럼 거짓말하지 않아서. 그러나 점점 그는 흙 위에 자라는 것들 자체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왜 어떤 식물은 강하고, 어떤 식물은 약한지. 왜 같은 씨앗도 땅과 물, 햇빛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지.

그것은 이상한 위로였다.

식물은 같은 종 안에서도 저마다 달랐다. 같은 밭에서 나도 어떤 것은 휘고, 어떤 것은 곧고, 어떤 것은 병에 약했다. 그런데도 그것을 두고 배신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저 특성이라 불렀다. 조건이라 불렀다. 더 잘 키우기 위한 문제라고 여겼다.

장춘은 그 차이가 좋았다. 사람의 세계에서는 결함이 낙인이 되지만, 식물의 세계에서는 관찰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점점 더 자주 식물도감과 생물학 서적을 펼쳤다. 잎맥의 모양, 꽃받침의 차이, 수술과 암술의 구조, 종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 누군가는 그것을 지루하다고 했지만, 장춘에게는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혼란스러운 세상 한가운데 숨어 있는 질서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실험실 보조로 일하던 나이 많은 조교가 그를 보고 말했다.

“너는 이상하게 식물을 볼 때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다.”

장춘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대부분은 그냥 외운다. 이건 무슨 과, 저건 무슨 속. 그런데 너는 왜 그런지 궁금해하는 눈이야.”

장춘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사람보다 식물이 더 솔직한 것 같습니다.”

조교는 피식 웃었다.

“사람한테 질린 소리로 들리는군.”

장춘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 무렵, 그는 점점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남는 방법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크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실력을 갖추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로 이길 수 없다면 결과로 말해야 했다. 혈통이 따라다닌다면, 그것과는 다른 이름을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밤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채웠다. 식물의 구조를 그리고, 관찰한 내용을 적고, 작은 차이들을 비교했다. 때로는 같은 씨앗 몇 개를 서로 다른 흙에 심어 두고 며칠 동안 싹의 차이를 관찰했다. 남들이 보기에 그런 집요함은 괴팍할 수도 있었지만, 장춘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마음이 잠잠해지는 시간이었다.

창밖에서는 때때로 취객의 웃음소리가 지나가고, 이웃집에서는 아이 우는 소리가 났다. 세상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그러나 책상 위의 식물 표본과 노트 위의 가는 글씨들은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그 질서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자각하지 못한 채, 서서히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해 가고 있었다.

권력의 세계가 아니라.

칼의 세계가 아니라.

흙과 씨앗의 세계로.

그 세계에서는 적어도, 누군가를 죽여야만 자신이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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